'철학과 나오면 뭐 먹고 살까?'
'인문학 공부하면 취직할 수 있을까?'
문과생이라면 이런 고민, 다들 한 번쯤 해보셨죠? 인문학은 특정 기술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므로 그 진로 방향도 천차만별입니다.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철학과 동문들의 경우 ▲진학, ▲금융, ▲심리, ▲영화, ▲창업, ▲언론 등 너무나도 넓은 스펙트럼으로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래서 진로, 취업에 대해 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요. 물론 인문대생을 특히 우대하는 기업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반대로 그것이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업무를 소화할 수 있음에 대한 반증은 아닐까요? 저는 제약회사에 입사한 철학과 동문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취재를 요청했습니다. 안국약품에서 근무하고 있는 오세윤(10·철학) 동문을 연세웹진에서 소개합니다.
Q. 안국약품에 대해 소개 부탁해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안국약품'이라는 제약회사에요. 안국약품은 TV 광고로 많이 알려져서 사람들에게 익숙하죠. 하지만 회사 직원이 천 명을 넘지 않아요. 매출도 2,000억 정도라서 대기업이 아니라 중견기업이죠.
안국약품은 제약회사에요. 말 그대로 약을 제조해서 공급하는 회사죠. 제약회사도 부서가 매우 많은데 ▲연구, ▲판매, ▲생산, ▲기획 등이 있어요.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영업입니다.
중요한 점은 주 고객이 의사라는 점입니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안약인 '토비콤'은 회사 매출의 10%도 안 되기 때문에 사실 안국약품의 주력상품은 아니에요. 그건 광고 용이죠. 저희는 병원에 가면 처방받는 약, 즉 전문의약품을 주로 만들어요. 특히 안국약품은 호흡기와 순환기 쪽 의약품을 주로 다룹니다.
Q. 처음 회사에 지원할 때 의학지식을 다 숙지하셨나요?
아니에요. 처음엔 아예 몰랐죠. 사실 토비콤 밖에 모른 채로 들어왔어요.(웃음) 최종면접까지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서 의학공부를 아예 다시 했어요. 정말 속성으로 단기간에 공부했고 매일 시험을 봤어요. 점수가 나오고 잘리고 또 잘리고... 그때 떨어지는 동기들도 있었어요. 제 동기가 40명 정도 있었는데, 3명 정도는 연수원 때 퇴사했어요. 인사담당자가 보기에 너무 공부에서 뒤처지면 최종면접에서 붙어도 떨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떨어지는 인원수는 기수마다 달라요. 다 붙는 기수도 있고 네다섯 명 떨어지는 기수도 있어요.
▲ 인터뷰 중인 오세윤 동문
Q.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는 세일즈, 즉 영업 업무를 합니다. 영업 담당자마다 지역을 정해줘요. 자신이 맡은 담당지로 외근을 나가서 그곳의 병원을 방문하고, 공중보건의사를 만납니다. 단독으로 찾아가서 제품을 설명하기도 하고, 식당이나 호텔에서 제품설명을 하기도 해요. 만약 회사가 신제품을 개발 또는 출시하게 되면 협회에서 100명 단위로 참석하는 심포지엄(symposium, 좌담회)을 열기도 합니다.
내근 업무는 회사에 출근해서 공문서를 만들거나 담당자의 매출 통계 관리 등이 있습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거의 외근을 나가요. 크게 업무를 두 가지로 보면 될 것 같아요. '내 지역의 데이터베이스 관리하기, 거래처와의 라포(rapport, 상호신뢰관계) 형성하기'
Q. 자신이 의학 전문가가 아님에도 의사를 설득해야 하는데 어땠나요?
쉽지 않죠. 저희는 거래처가 전문가잖아요. 그만큼 준비를 확실히 해야 하죠.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회사 제품만은 원장님보다 더 많이 안다'라고 마음먹어야 설득을 할 수 있잖아요.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은 담당자 역량에 달린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자신이 판매하려는 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이 약을 쓰세요' 하는 것과 많이 공부하고 나서 설명하는 것과 차이가 나는 거죠. 만약 '내가 의사라면 누구의 말이 더 신뢰가 가고 누구 제품을 쓸 것이냐'라고 생각해 본다면, 좀 더 제품 설명을 잘하고 믿음이 가는 담당자를 선택할 것 같아요.
영업직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고, 제품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지점워크샵 '함께해요' 행사로 함께 볼링장에 간 사진
Q. 회사의 분위기는 어때요?
남초회사에요.(웃음) 남자가 되게 많아요. 여자가 있는 팀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분위기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에요. 상식선에서 행동하면 되고, 너무 풀어지지 않은 적당한 긴장감이 딱 좋다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가 딱딱한 분위기는 아니랍니다.
출근은 오전 8시, 퇴근은 오후 6시에요. 야근은 거의 없어요. 세미나, 심포지엄 있는 날은 조금 늦게 끝나요. 영업직의 특성상 접대도 있어요. 예전에 아버지 세대의 접대문화 때문에 안 좋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9시에 다 끝나요. 술 한잔 두잔 하는 거죠. 제가 회사 3년 다니면서 접대가 밤 11시 이후로 끝난 적은 없어요.
Q. 제약회사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철학과 졸업을 앞두고 제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일해야 할 때가 오니까 제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돌이켜봤어요.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고 밴드, 학회활동을 주로 하면서 누구랑 만나는 게 매우 즐거웠어요. 그리고 그 무리를 이끄는 것도 좋아했죠. 그래서 사무직보다는 영업직을 해서 내 의사를 가지고 남을 설득하는 일이 더 끌렸어요.
'그럼 이제 영업직 중에서 뭐하지?' 영업직이 대표적으로 세 종류가 있더라고요. 그 중 자동차딜러, 보험회사는 불특정 다수에게 영업해야 한다는 점이 걸렸어요. 그런데 제약회사는 수요가 좋아서 신입사원을 많이 뽑는 곳이고, 블루오션은 아니지만 계속 성장해나가요. 사람이 아파서 병원을 가는 건 수요가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제약회사에 취직하기로 결심한 거죠.
그리고 저희 과는 전공 불문이잖아요? 어디든지 불러준다면 다 취업할 수 있죠. 우리 회사의 영업부는 정말 여러 가지 과에서 오셔요. 물리치료학과, 화학과, 영문학과... 언뜻 보면 제약회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과도 아주 많아요. 학교도 되게 천차만별이에요. 어디 출신인지 보다는 개인 능력이 더 중요한 거죠.
▲ 신입사원 당시 오세윤 동문
Q. 진로, 취업에 있어 힘들어서 좌절했던 시기가 있다면?
취업 준비할 때보다는 일 할 때 위로받고 싶었어요.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 생활과 자신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잖아요. 취직하면 이제는 제일 막내부터 시작해야 하니까요.
또 힘들다고 느꼈던 때가 연수원에 들어와서 제약공부를 시작한 처음 6개월 동안이었어요. 보통 사람들이 연봉을 보고 제약회사에 많이 지원해요. 그런데 그것만 보고 제약회사에 오면 정말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서 나가요. 저의 경우는 제약 공부가 너무 저랑 안 맞는 거예요.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공부해야 할 양은 많은데 시험 점수도 잘 나오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받고, 맨날 깨지고... 어느 정도 힘들었느냐면, 6개월 동안 피부가 다 썩어있었어요.(웃음)
그런데 처음엔 누구나 힘들잖아요. 하다 보면 숙달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 이제 실수 안 하네' 이런 얘기를 듣게 돼요. 그러면서 생활이 점점 펴게 되죠. 강이나 계곡을 보면 급하게 꺾인 곳이 물살이 강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갑자기 큰 변화에 적응해야 할 때) 그때가 가장 힘들고 정신이 없죠. 그런데 그 시기를 넘기면 편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 자신이 힘들다고 '나랑 너무 안 맞아, 내 길이 아닌가 봐' 하고 하던 일을 그만두거나 바꾸기보다 그 시기가 지나갈 때까지 인내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Q. 고민이 많을 후배들에게
3학년, 4학년이 되게 고민 많을 시기잖아요. 제가 후배들에게 추천하지 않는 것이 의미 없는 휴학이에요. '나 이번 학기는 그냥 아르바이트나 할래.', 아니면 '유럽이나 갔다 와야지.' 이런 마음으로 한 학기를 쉬기엔 시간이 정말 아까워요. 정말 계획이 있어서 얻는 게 훨씬 많은 휴학을 한다면 정말 좋죠.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아, 나는 3학년이나 됐는데 너무 안 논 것 같아. 좀 놀아야 하는 거 아니야?' 마음이 약해지는 거죠.
저는 학부생 때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저 놀고 싶어서 갔던 미국이었고, 거기서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어요. 갔다 와서 도움이 안 됐죠. 그때 다른 걸 했으면 좋았을걸... 정말 남는 게 없더라고요. 남은 건 어학 점수인데 이제 그것도 유효기간이 끝났죠.(웃음) 저로서 후회하는 부분이에요. 휴학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그다음에 하고 싶은 걸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봐요.
▲ 현재 수원팀에서 근무 중인 오세윤 주임
Q. 목표를 이루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 있나요?
제습관 중의 하나가 계획을 쓸데없는 것까지 정말 많이 세워요. 제가 20살 때 처음 대학 와서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이때는 뭘 하고 있을 거고, 또 이때는 이걸 하고 있을 거야!'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얼추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제가 30살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때 쓴 일기장을 봤는데 소름이 돋더라고요. 80%는 맞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기분이 좋아서 올해 1월에 10년 계획을 다시 세웠어요. 40대까지의 계획이죠. (계획을 세우면 그렇게 살게 되나요?) 몸과 마음이 그쪽으로 따라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꼭 그렇게 안 살아도 돼요. 변동될 수도 있죠. 그저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라고 해두면 긍정적으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엔 20대가 정말 최고의 나이인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절대 몰라요, 절대로 몰라!(웃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품고 열정을 쏟는 오세윤 동문의 모습이 굉장히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다른 일을 계속해서 찾아다니는 동문 역시 많다고 합니다. 현재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더 몰두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과정은 졸업 후에도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철학과 학우로서 직접 철학과 동문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조금은 사라진 듯합니다. 자신이 궁금하거나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동문들 선배님, 교수님을 통해 직접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막막한 미래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목표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꿈을 좇아갈 학우 여러분을 응원합니다.